정신건강칼럼
[정신건강칼럼 8월]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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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이수연
20대 여성 A는 명문대학을 다니며,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첫 2년간은 높은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3학년이 되면서 늘어나는 공부량이 점점 부담스러워 졌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지만, 책상 앞에 앉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낮은 점수의 성적표를 받았고, 이후 얼굴의 근육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하루 종일 지속되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을 옮겨 다니며 각종 검사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해 정신과 진료를 권유 받고 외래를 방문했습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얼굴 근육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한 불편감을 무표정하게 나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치료자의 질문에 비교적 예의를 갖춰 대답은 하지만, 대략 30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어떠한 감정적인 교류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치 그녀는 ‘자,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부 제공했으니 날 치료해 보세요’ 라고 치료자를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큰 법률회사에서 근무하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변호사 이지만 일이 바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소위 전문직이 되지 않으면 대학 학비를 지원해 주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A의 아버지는 A가 학교에서 상을 받고, 고득점의 성적표를 가지고 올 때에만 A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점차 그녀는, 자기 자신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이고, 아버지가 원하는 딸이 되어야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그녀의 태도는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A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친밀감을 주고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A는 자기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 아버지, 더 나아가 타인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자기 가치를 확인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본인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A와 같이, 외부의 확인을 통해서만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만하면 괜찮다’ 고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못합니다. 내면의 본인 모습이 너무도 약하고,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외적인 건강(A의 경우 얼굴 근육이 당긴다는 비특이적 증상)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당당하고, 다소 거만해 보이기 까지 하는 A의 내면에는 언제 버림받을지 몰라 두려워 하는 작고 연약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A는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던 어린 시절, 그리고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 공부에 대한 압박감 등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점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과거의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A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 나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