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칼럼
[정신건강칼럼 8월]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나요? | ||
---|---|---|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나요?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실 이지수
찜통 같은 더위가 어느 새 한풀 꺾이고, 저녁이면 꽤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늘이 높아지고 이제는 한낮에 내리쬐는 햇볕도 벼를 익게 하는 가을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달 칼럼은 무엇을 주제로 써볼까 생각하는데, 어디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옆집에 사는 여자 아이 같은데 언뜻 ‘엄마 미워어어어', ‘아빠 미워어어어'하는 소리에 울음과 원망이 가득 섞여 있습니다. 한동안 아이를 달래고 타이르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도 번갈아 들리더니 시간이 흐르자 잠잠해졌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웃음이 납니다. ‘엄마, 아빠가 밉다’고 말하는 아이의 꾸밈없음과 그 원망과 투정을 받아주는 옆집 부부의 든든함이 전해져서 저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세상이 정말로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낍니다.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굴러가는 것 같을 때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미워하죠. 그리고 아주 어린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세상의 전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에 엄마와 아빠 말고도 다른 사람들, 사물들,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엄마,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미움은 환경 속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물론 아이는 세상 만사가 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엄마와 아빠를 아무리 ‘밉다’고 화를 내고 투정을 부려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어느 정도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맞추어 처음 바랬던 것을 양보하고 포기해야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쏟아내는 미움과 원망을 받아주고, 인정하고, 달래가면서, 또 미움의 표현이 지나치게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명확하게 한계를 설정하는 안전한 분위기 속에서 ‘미움’은 ‘주장’, ‘화’, ‘적대감’, ‘서운함’, ‘아쉬움’, ‘좌절감’, ‘슬픔’의 감정으로 풍부해집니다. 옆집 아이도 엄마, 아빠를 밉다고만 할 게 아니라 조금씩 자기가 바랬던 것을 말로 전달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배워갈 겁니다.
그런데 한편, 어른이 되면서 미워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미움은 나쁘고 안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멀리하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가시돋힌 말과 행동에 당황스러워 하는 어른이 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가설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것 같고, 관계가 끊어져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벌어진 것이 아닌데도 우리 마음 속에서는 미움의 결과를 너무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더라도, 기대가 어긋나 실망하더라도, 밉다는 생각이 들면 서둘러 다른 좋은 점을 떠올려 희석시키고, 나에게 잘해주었던 기억들을 찾아서 서운함을 빠르게 추스리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며 사는 셈이지요. 실제로 내가 상대를 미워하고 그 감정을 표현해도 관계가 끊기지 않을 것이라는, 상처를 주고 받아도 서로 어루만져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늘 굳건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상담실 안에서도 ‘애증의 관계’는 자주 등장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예술 작품에 ‘애증’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는 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가지 감정 속에서 심란해하고 고통스러워 해왔는 지 말해줍니다. 한 사람에게 애정도 느끼고 미움도 느끼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느껴지고, 이상하고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많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움을 느끼고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서로를 증오할 때 그저 증오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점, 아쉬운 점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율할 수 있다면, 사랑은 더 깊어집니다. 조율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다면, 사랑, 관계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더 나은 관계를 찾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있을 때 삶과 관계를 풍요롭고 깊게 만들어주는 변화도 시작될 수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