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울화씨는 22세에 남편과 얼굴도 모르는 채로 결혼했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바람을 피우면서도 뻔뻔했으며, 폭언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아이 셋을 낳아 고생하며 키우느라 그저 참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에서 열불이 나고 가슴이 치밀고 분한 마음은 지속되었다. 세월이 흘러 60이 된 지금도 화가 나고 눈물 지을 때가 많지만 남편에게 화풀이 한 번 하지 못했다.
나울화씨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나울화씨가 ‘화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화병은 환자가 남편 혹은 시댁 어른들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경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화’란 부당한 사회적 폭력이나 외상 등에 의해 발생하는 분노감정으로, 여기에는 피해자로서의 억울한 감정과 방어할 수 없는 외부 요인 혹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화병은 이를 억압하고 억누른 감정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화병의 유병률은 일반 인구에서 약 4-5%로 알려져 있으며, 정신건강의학과의 신경증적 환자군 중에서는 약 20-45%로 보고됩니다. 주로 중년 이상의 나이가 많은 여성,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은 경우,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군 등에서 보입니다. 여러 외부 스트레스 등으로 화가 발생하면 개개인이 이를 어떻게 대응하고 방어하는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화를 잘 억제하거나 승화시키는 경우는 잘 해소가 되지만, 억압, 전치, 신체화, 투사 등의 방어 기제를 보이는 경우 불안, 우울, 공포 증상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환자가 호소하는 다양한 증상에는 우울, 불안 등 스스로 의식하는 감정 반응뿐 아니라 속에서 치밀어 오르거나, 응어리짐, 가슴답답, 구갈 등으로 표현되는 신체 증상이 포함됩니다. 신체 증상으로 인해 환자들은 내과 등 다양한 과의 진료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지속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우리 몸의 교감신경계를 흥분시키며, 카테콜라민 분비를 증가시켜 심장 질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병의 발생과 증상의 표현에 한국 특유의 문화적 배경이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단 체계에서는 화병을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실제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한 환자들은 우울증, 불안증, 신체화장애 등의 질병으로 진단받게 됩니다.
많은 환자들은 화풀이, 한풀이 등을 통해 자가치료 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화를 표출하거나 보복을 하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기리에 종영한 ‘아내의 유혹’ 등과 같이 우리나라 드라마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복수 테마는 이러한 화병의 자가치료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환자들은 종교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기독교는 폭력이나 고통에 대한 용서, 사랑, 희생,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화를 승화시키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상이 심한 경우 자살에 대한 생각이 증가하기도 하고, 불안 증상이 심한 경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도 하므로 치료를 위해서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환자의 증상에 맞는 약물 치료는 도움이 되며, 항우울제를 비롯하여 불안, 불면 등의 증상 조절을 위해 항불안제, 수면제 등을 투약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 내원한 경우 환자들은 오랜 고통의 세월을 털어놓으며 하소연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개운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정신 치료적으로 카타르시스, 제반응의 효과로 볼 수 있습니다. 화병의 원인이 가족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때는 가족치료, 부부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가족의 이해와 배려는 화병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분노를 대처하고 잘 조절하는 방법으로는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됩니다. 행동적으로는 신체 이완 반응에 초점을 맞추는 바이오피드백을 시행하고, 인지적으로는 화를 불러일으키는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과도하게 일반화하거나 파국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막고 현실적이고 좋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화는 인간관계 맥락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화 양식이나 행동을 살피는 것도 하나의 치료적 접근이 됩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강사 안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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