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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야기

건강이야기
두려운 선택 저자 : 홍누리

 

별것 아닌 병은 없어서

2002년이었다. 영순 씨(여, 65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리려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변기 안은 짙은 콜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 날도 짙은 혈뇨를 쏟아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야간 발작성 혈색소뇨증을 진단받았다. 적혈구가 깨져 소변으로 배출되는 병이었다. 혈뇨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오늘은 어때?” 아침마다 묻는 남편에게 영순 씨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늘도 조심해. 너무 피로하지 말고”라며 시무룩하게 출근하는 남편이 영순 씨 눈에는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가족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안일을 할 뿐인데도 어느 순간 기운이 쏙 빠지곤 했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누워야 했다. 스트레스와 피로, 감기를 방치했다가는 소변이라 하기 어려운 짙은 피를 종일 쏟아냈다. 가벼운 모임도 줄여가며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엔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치료 약이 없다는 점이었다. 피를 많이 쏟으면 병원에 들러 수혈을 하고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며 약 기운으로 버텼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까?’ 혈뇨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답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남편과 두 아이에게 마음의 짐이 될까 봐 피곤하고 아파도 말을 아끼게 되었다.

 

서울아산병원과의 인연은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진료실에 앉으면 깊숙이 숨겨둔 쓸쓸하고 서러운 마음을 털어낼 수 있었다. 아내이자 엄마라는 역할을 잠시 던지고 ‘환자’로만 자신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프고 힘든 것을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위로였다.

 

 

임상시험에 동의한 이유

“좋은 임상시험 케이스가 있어요. 정영순 님이 참여하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2016년 임상시험 약을 소개받았다. 설명을 들을수록 하루라도 혈뇨를 보지 않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잔뜩 기대에 차 가족에게 임상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 안 돼.”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임상시험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라 여기면서도 “검증된 약이 아니잖아!” 남편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영순 씨의 마음에 콕 박혔다.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겁도 나기 시작했다. 단념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박수연 연구코디네이터가 결정했냐고 물으면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결정하기가 힘드시죠? 영순 님의 조건과 잘 맞는 약이어서 놓치기 아쉬운 기회예요. 고생 많이 하셨는데 시도는 해봐야죠. 만약 제 가족이 영순 님과 같은 상태라면 저는 꼭 받으라고 했을 거예요. 마음이 정해지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차분한 기다림과 진심 어린 제안이 영순 씨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오빠와는 다른 결말

지금의 병을 앓기 전, 영순 씨는 재생 불량성 악성 빈혈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서울아산병원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법은 동종조혈모세포 이식이 유일했다. 하지만 형제들의 유전자와는 맞지 않았고, 이식받을 경제적 여건도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절망을 스스로 멈추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치료법이 없던 1980년대. 큰 오빠는 같은 병으로 갑작스레 삶을 마감했다. ‘이러다가 나도 오빠처럼 되겠지?’

 

의사는 차선책으로 30% 성공 확률의 치료 약을 소개했다.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3주간 입원해 치료받자 혈액 수치는 오르기 시작했다. 약 하나가 오빠와는 다른 운명으로 이끈 것이다. “이제 됐네요!”라는 의료진의 밝은 목소리가 20여 년이 지나도록 생생했다. 영순 씨는 임상시험에 동의하고 집에 가는 길에 그때의 기쁨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나한테 딱 맞는 약이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놀라운 변화

일주일에 한 번씩 2시간 동안 임상시험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주사만 맞았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빠져 침대에서 내려올 때부터 남편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기대와 불안이 섞인 채로 다음 날을 기다렸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실망하기엔 일렀다. 이른 아침 용변을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변기 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냐는 남편의 질문에 “아주 깨끗해~”라는 대답을 15년 만에 속 시원히 내뱉었다. 늘 따라다니던 피로감도 점차 사라졌다. 친구들과 만나고 운동을 시작하며 보통의 하루에 감사했다.

 

임상시험 기간 내내 박 연구코디네이터는 평소 먹는 약과 몸 상태를 꼼꼼히 살펴주었다. 진료실에서 못다 한 질문이 있거나 진료 예약 내용을 잘 모를 때도 걱정이 없었다. “박 선생님, 나 임상시험 기회를 놓쳤으면 정말 후회했을 거예요.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려준 거 정말 고마워요.” “영순 님이 선택을 잘하신 거죠. 건강해지는 모습 보면서 저도 일할 맛이 나요!” 2년 기한이었던 임상시험 기간은 조금씩 연장되어 5년간 무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신약이 시판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인생이란 게 두려운 선택의 연속이지만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 든든했어요. 그게 서울아산병원이어서 다행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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