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를 시작하며
세상에서 딸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다. 딸은 열다섯 살이다. 엄마는 유방암 말기 환자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딸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모녀에게 이별의 순간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이 글은 엄마와 딸이 생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준 아산 가족들의 이야기다.
보호자를 찾아라
지난 4월 25일 서관 6층 암환자 긴급진료실에 응급환자가 실려 왔다. 종양내과 김성배 교수가 외래에서 올려 보낸 환자였다. 53세 유방암 말기 환자인 그녀는 숨이 가쁜 상태로 호흡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의식도 희미해져갔다. 검사 결과 혈전이 폐동맥을 막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할 보호자를 찾았지만 환자는 병원에 혼자 온 상태였다. 의료진은 급하게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남편은 오래전 사망했고 친정 식구들이 있긴 했지만 전화를 받은 이들은 무슨 사연인지 그녀를 외면했다.
남은 건 중학교 3학년인 열다섯 살 외동딸. 연락을 받은 딸은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다말고 포항에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호자는 찾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열다섯 살 미성년자의 동의서가 법적 효력이 있는지와 진료비 보증인을 세울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원무팀의 의견을 구해야했다. 긴급진료실 의료진은 서둘러 관련부서에 빠른 답변을 요청했다. 원무팀에서는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이므로 진행하라는 답을 보내왔다. 이제 그녀의 생명은 다시 의료진에게 넘겨졌다. 오후 6시 흉부외과 의료진이 응급 수술 준비를 시작한다.
어린 보호자의 눈물
열다섯 살 보호자와 마주한 응급의학과 이정현 전공의는 잠시 먹먹했다. “위험한 수술이라 수술 중 환자의 심장이 멎을 수도 있으며… 심장이 멎었을 경우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이런 엄청난 상황을 소녀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설명을 듣는 어린 보호자는 눈물을 쏟았다. 이정현 전공의도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엄마의 아픈 모습을 봐왔지만, 최근에 엄마 몸속에 있는 암세포가 뇌로 전이됐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자신이 듣고 있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다섯 소녀는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엄마를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엄마의 따뜻한 손을 한 번만 다시 잡아볼 수 있다면, 그리고 안녕이라고 인사할 수 있다면…
눈물을 멈춘 딸은 여러 장의 동의서에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적었다. 볼펜을 쥐지 않은 다른 한 손에는 엄마가 마시다만 오렌지주스 병이 들려있었다.
밤 9시 흉부외과 주석중 교수팀이 응급수술을 시작한다. 최악의 결과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주석중 교수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생명을 지켜냈다. 수술은 새벽 3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있으면서도 심각한 고비가 여러 번 찾아왔다. 어린 보호자는 병원에서 대기하며 사경을 헤매는 엄마를 하루에 두 번 만났다. 말수가 적은 딸은 그때마다 엄마의 손만 잡고 있었다.
그런 모녀를 지켜보는 흉부외과 중환자실 이남주 UM은 자신의 딸과 같은 또래인 어린 보호자가 자꾸 마음에 쓰였다. 잠은 어디서 자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한번은 면회가 끝나고 가는 어린 보호자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보호자는 예전에 엄마를 간병했던 간병인이 자주 불러서 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준다고 했다. 그제서야 이남주 UM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엄마도 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일까. 수술 2주 후, 엄마는 모든 고비를 넘기고 딸과 함께 72병동으로 옮겨졌다.
이별을 준비하다
김성배 교수가 기억하는 그녀는 수 십 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씩씩했다. 어린 딸이 있어서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제 어려운 말을 해야 했다. 큰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그녀의 몸 안에 암세포는 그대로였고 병원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었다. 남은 시간은 한 달 정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시기였다. 엄마와 딸은 담담하게 김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호스피스 전문병원을 연결해주는 양윤정 호스피스 코디네이터가 엄마를 만났다. 그녀는 엄마에게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딸아이가 한 달 째 학교를 못가고 있어요. 집근처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싶어요.” 양윤정 코디네이터는 수소문 끝에 무료 간병을 지원받을 수 있는 포항선린병원을 연결해주었다. 원무팀 김이진 씨는 어린 보호자가 감당해야 하는 800만 원 상당의 진료비를 해결해야 했다.
포항시청을 연결해 의료비 긴급 지원금 300만 원을 받았고, 우리 병원 사회복지팀에 도움을 청했다. 최보윤 사회복지사는 우리 병원에서 수술한 유방암 환자가 VIC실에 기부한 불우환자기금 500만 원을 끌어다 주었다. 그렇게 퇴원 준비가 끝났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얼떨결에 서울에 올라온 어린 보호자는 의료진의 배웅을 받으며 한 달 만에 엄마와 함께 우리 병원을 떠났다. 여전히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엄마, 떠나다
엄마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2주를 지낸 후 6월 초 임종했다. 엄마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통증 조절이 잘됐고 딸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편안하게 떠났다고 한다. 이별을 해본 사람은 안다.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고 헤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말이다. 혼자 남은 딸은 잘 지내고 있을까? 여러 차례 전화를 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 왜 이리 노파심이 느는지 혹시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호스피스 병원, 동사무소, 관할 파출소에 딸의 근황을 수소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딸은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장례는 고인이 다니던 교회에서 진행해주었고, 딸은 후원단체와 연결돼 정기적으로 따뜻한 돌봄을 받고 있다. 경찰 아저씨들은 혼자 지내는 열다섯 소녀의 집을 자주 순찰해 주고 있다. 가장 반가운(?) 소식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주변의 사랑과 관심이 있어도 혼자 남겨진 열다섯은 세상이 두려울 나이다.
모르는 전화번호를 외면하는 것은 그 두려움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답 없는 그녀에게 아산 가족들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다. 엄마가 늘 너와 함께 하실 거야.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 네 발걸음이 가벼우면 엄마의 손이 너의 등을 받쳐주고 있는 거라 생각하렴. 엄마는 그런 사람들이야. 널 만났던 아산 가족들 모두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단다. 지금 이 시간을 부디 잘 견뎌주길…’.
Storytelling Writer 윤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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