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론병을 아십니까?
희귀난치병으로 알려진 크론병은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관 전체에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이다. 반복적으로 염증이 심해지면 대장과 소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여러차례 받아야 한다. 결국에는 인공장루를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적지 않은 질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급증하고 있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원인을 모르니 완치할 수 있는 방법도 ‘아직’ 없다. 크론병이 슬픈 이유는 또 있다. 10대, 20대 한창 피어나는 젊음을 침범한다는 것이다. 인희씨(23)가 우리 병원에 와서 병명을 알게 된 것도 열네 살 때다. 하루에도 스무 번씩 화장실에 가야하고, 입퇴원을 반복하느라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동안 배를 여는 수술 두 번, 치루수술은 네 번을 받았다.현재 대장은 없고 소장만 2미터 50센티가 남았다. 지난 4월에는 영구적인 인공장루 수술도 받았다.
인형 같은 그녀
수술 사흘 째 되던 날, 병동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뭘 해도 예쁜 나이, 보기만해도 반짝반짝할 나이에 인공장루 수술을 받고 누워있을 그녀를 만나러 가는 마음이 쉽지는 않았다. 병실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린 후, 그녀를 만났다. 앉을 수가 없다며 누워 있었다. 힘들면 가겠다고 했더니,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인데 괜찮다고 한다. 눈높이를 맞춰 자리를 잡았다. 이제야 그녀가 제대로 보인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얼굴, 안아주면 부서질 것 같은 깡마른 몸(33kg), 나이에 비해 작은 키...꼭 마론 인형 같다. 열아홉 살 때 대장의 절반을 잘라낸 인희씨는 그 후 얼마동안 새로운 세상을 살았다. 검정고시로 대학에도 가고 스키도 타고 아이젠 끼고 등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8개월 전, 처음으로 인공장루 수술 이야기를 들었다. 버티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그녀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트럭이 배 위를 지나가는듯한 통증과 설사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화장실을 가야했다. 체중이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이렇게 끝나는구나...싶었다. 결국 수술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어렵게 돌아온 길이지만 정작 수술 후의 그녀는 왜 그렇게 고민했는지 모르겠다며 하루의 시간이 달라졌다고 좋아라했다. 책도 읽을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화장실 갈 걱정도 없단다. 인공장루 연결한 부분이 산딸기 같이 예쁘다고도 했다.
‘양과유’를 찾아라
10년 넘는 투병기간 동안 그녀를 견디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인희씨는 크론병 환자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고 했다. ‘양과유를 찾아야 살 수 있다.’ 처음에 필자는 무슨 과자 이름인 줄 알았다.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 병원 양석균 교수(소화기내과)와 유창식 교수(대장항문외과)를 부르는 말이었다. 인희씨는 양석균 교수가 어머니 같다고 했다. 몰려드는 크론병 환자를 살피느라 휴가도 제대로 못 가는 분이라며, 한번은 회진 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드렸더니 수줍어하며 도망갔다고 한다.
유창식 교수는 아버지 같단다. 회진 때면 밝고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고, 수술 잘됐다고 시원시원하게 말해줘서 환자를 불안하지 않게 한단다. 빠트릴 수 없는 의료진이 한 명 더 있다. 장루 전문 황지현 간호사. 황 간호사는 상처를 치료해줄 때마다 ”니 똥꼬 나만큼 이쁘게 봐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러면서 늘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전체 크론 환자의 70%가 우리 병원으로 오기 때문에 같이 투병할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어머니.
붕어빵 파는 천사
인희씨가 초등학교 때 혼자된 어머니는 겨울에는 붕어빵을 팔고, 여름에는 식당일을 찾아다닌다. 요리 솜씨가 좋아 예전엔 서울 큰 식당에서 주방장을 했었다. 인희씨가 아프면서부터 어머니의 인생도 달라졌다. 치루수술을 여러 번 받은 인희씨는 배변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근처 화장실에서 어머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 딸의 치료비도 벌어야 하고, 언제든 딸에게 달려가야 하는 어머니는 고민 끝에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 인희씨 전화를 받으면 붕어빵 굽다말고 현금만 챙겨서 달려갔다. 외딴 곳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딸을 다독이고 새 옷을 갈아입히며 어머니는 가슴으로 울었다. 돌아와 보면 붕어빵은 다 도둑맞기 일쑤. 매일 새벽시장에도 나갔다.
잘 먹지 못하는 딸을 조금이라도 먹이기 위해 새 밥, 새 반찬으로 아침상을 차려주기 위해서다. 그리곤 양말 다섯 켤레를 신고 칼바람 부는 겨울 한복판으로 나가 붕어빵을 구웠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딸의 예쁜 옷을 사다 날랐다. 병마로 딸의 청춘이 펴보지도 못하고 낡아가는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인희씨가 인공장루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에도 어머니는 병원 지하 아케이드에서 잠자리 날개 같은 원피스를 선물로 사줬다. 내 새끼 그동안 열심히 투병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수술 한 달 후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수술 한 달 후 광주광역시 한 고기집에서다. 퇴원하면 상추쌈에 고기 싸먹고 냉면까지 먹고 싶다던 인희씨에게 필자도 선물을 하고 싶었다. 쉴 새없이 고기를 싸먹는 그녀 앞에 어머니는 자꾸만 음식 접시를 밀어놓는다. 어머니는 딸이 잘 먹는 모습이 신기해 죽겠다고, 행복이 뭐 별거냐고 진짜 행복하다고 싱글벙글이다. 그러다가 딸에게 한마디 하기를 “근데 인희야. 43kg 넘으면 다이어트 해라. 하하”
스물세 살 인희씨는 아직 낯선 인공 장루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화장실에 가면 변기에 앉아서 한 번 씩 힘을 주다가 ‘이거 아니지’ 하며 어이없이 웃는다. 그래도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정을 주고 있다. 인희씨에겐 아픔까지 사랑해주는 남자친구도 있다. 같은 교회 오빠다. 그는 인공장루 청소를 자신이 해주겠다며 얼마 전 청혼을 했다. 어쩌면 올 가을 웨딩드레스 입은 그녀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 어버이날, 인희씨는 결혼하면 홀로 남게 될 어머니에게 아주 특별한 부탁을 담아 편지 한 통을 썼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의 부탁을 꼭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엄마, 혼자서 아픈 저를 간호하며 견디시고 이겨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엄마 존경해요. 붕어빵 장사 하실 때 박스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냥 안보내시고 붕어빵 두둑이 챙겨주시는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자랑스럽고 그런 엄마의 딸이 나여서 감사해요. 이제는 엄마도 엄마 자신을 위해 사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딸이 될게요.”
Storytelling Writer 윤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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