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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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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물, 장가르 저자 : 홍누리

나의 보물, 장가르

 

장가르는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면서 말이 부쩍 많아진 장가르는 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통통한 볼을 씰룩대며 팔씨름을 하자고 덤비는 손주의 손을 할머니는 매번 맞잡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져주었다. 평생에 이렇게 기분 좋은 패배는 없었다. 그런 장가르가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다. 진단을 받은 뒤 넋을 잃은 며느리에게 할머니는 큰소리쳤다. “걱정 마라. 내가 어떻게든 장가르를 낫게 할 테니까!

 

아가, 울지 말렴
백혈병은 카자흐스탄의 드라마에서도 단골 소재였다. 주인공이 끝내 병마를 이겨낸 것처럼 장가르도 그럴 거라 믿었다. 그런데 입원 기간은 8개월간 이어졌고, 그 사이 병실에서 숨을 거두는 아이들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마다 장가르의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 항암 치료가 차도를 보이자 탈출하듯 퇴원했다. 하지만 밤새 허리가 아프다며 악을 쓰고 우는 장가르를 응급실로 다시 데려가야 했다. 뒤늦게 받아든 유전자 검사 결과에서 백혈병 중에서도 위험도가 높은 필라델피아 염색체 양성인 걸 알게 되었다. 현지의 의술로는 치료가 어려웠다. 할머니는 실력 좋은 해외 병원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곧 온 가족은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소아청소년과 임호준 교수는 아이의 상태와 모든 가능성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이식 성공률이 70%라는 이야기는 4,200km를 가로지른 가족에게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러나 임 교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평생 사업을 꾸려 온 할머니는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불확실한 확률보다 사람의 진심을 따르곤 했다. 주사를 놓는 순간에도 바늘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장가르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는 간호사에게 단단한 신뢰를 느꼈다. 이곳에선 모든 게 잘 풀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곧 여동생에게서 골수를 이식받은 장가르는 몇 달간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재발 소식과 함께 1개월 이내에 재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준비해 온 치료비는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이만 생각해야 할지, 현실적인 타협을 해야 할지 가족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흔들림이 없었다. 고향의 사업을 정리하고 모금 활동을 펼치며 치료비를 마련했다. 직장 때문에 고국에 돌아갔던 아빠는 골수를 기증하기 위해 한국으로 급히 돌아올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에서 하늘길은 막혀 있었다. 아이의 시급한 상황을 잘 아는 병원이 대신 나섰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도움을 요청했고 외교부와 총영사관에서도 힘을 모았다. 극적으로 특별기에 탑승한 아빠는 2주간의 격리 비용과 체류비까지 지원받았다. 많은 이들의 도움 끝에 장가르의 이식이 진행되었다. 치료실 밖에서 할머니는 참아온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 아기, 잘 이겨내야 할 텐데.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을 걸….” 국제교류 업무로 통역을 맡아온 라히야 사원이 다독였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이 잘 해낼 거예요. 여기서 울지만 말고 바우르삭(카자흐스탄의 전통 빵)을 만들어 오는 건 어때요?” 고향에선 좋은 일이 있을 때 빵을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할머니는 숙소로 돌아가 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고한 의료진과 나눴다. 기대대로 기쁜 소식은 매일 전해졌다. 장가르의 백혈병 수치가 조금씩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음에 귀 기울인 치료
온 가족이 골수이식 공여자 검사를 받을 즈음, 장가르 엄마는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는 걸 알았다.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장가르는 내가 지킬 테니 넌 고향으로 돌아가렴.” 며느리를 설득시킨 할머니는 장가르에게도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을 이해시켰다. 할머니의 손길로는 부족한 엄마의 자리를 간호사들이 채워주었다. 멀리서도 “장가르~” 부르며 다가와 안아주면 장가르는 곧잘 장난쳤다. 그리고 맛있는 과자를 내미는 간호사의 손을 잡기 위해 조금씩 걷고 뛰었다. 할머니는 예전으로 곧 돌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키워갔다. 그런데 영상 통화에서 엄마 품의 갓 태어난 동생을 본 장가르는 입을 닫기 시작했다.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린 듯 통 웃지 않았다. 할머니는 치료 후유증이나 부작용을 의심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보물이 빛을 잃었어요. 똑똑한 모습이 전부 없어져 버렸다고요!
임호준 교수는 의료진과 장가르의 할머니를 한자리에 모았다. 영상을 통해 고향의 부모까지 함께했다. “장가르가 완치될 때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품인 것 같습니다.” 아이의 오랜 치료로 인한 우울증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한 조치였다. “정서적 안정이 치료에 도움이 될 겁니다. 현지 의료진에게 치료 내용과 계획을 잘 인계하겠습니다. 잘 유지하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만납시다.” 끝까지 책임지겠다던 애초의 약속과는 조금 다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안도했다. “좋은 결정을 내려줘 고맙습니다.” 장가르의 마음과 성장, 가족의 불안을 살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부모까지 배려한 소통 방식은 마음을 더 가까이 이어 주었다.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는 장가르의 손을 잡았다. “우리 다음에 올 때는 좋은 소식으로 교수님을 놀라게 해드리자!” 장가르는 손에 힘을 꽉 주며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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